[방성석 칼럼] 신구차(伸救箚)는 잘못 알려진 상소문이다.
[방성석 칼럼] 신구차(伸救箚)는 잘못 알려진 상소문이다.
  • 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
  • 승인 2020.07.2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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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br>
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

이순신을 죽이라는 사람과 살리라는 사람.

임금 선조가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는 비망기를 내렸다. 정유년(1597) 초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반간계로 의금부에 투옥되었을 때다. “이순신이 조정을 속인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하여 죄에 빠뜨렸으니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으니 율()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행지중추부사 정탁이 이순신을 살려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저의 의론은 이렇습니다. 이순신이 이미 능력으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조정에서 통제사의 칭호를 내려주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공과 그의 능력에 대해 혹시 논의할 만한 것도 있을 듯합니다. 지금 이순신이 옥에 갇힌 것만 해도 이미 율명(律名)이 매우 엄중하다는 것은 보여주었으니, 다시 공이 있고 재능이 있다는 의론으로 특명을 내려 사형을 감해주어 그가 공을 세워 보답하게 한다면, 조정에서 처리하는 도리가 마땅함을 잃지 않을 듯합니다. 신이 부질없는 소견이 있어서 감히 성총을 번거롭게 하여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주상 전하께서 재가하여 주십시오.”

신구차(伸救箚)는 틀리고 신구의(伸救議)는 맞다.

정탁의 문집 약포집(藥圃集 1760)에 의하면 이순신을 살려낸 상소문은 이순신옥사의(李舜臣獄事議)였다. “3월에 통제사 이순신이 체포되어 추국을 당한 일로 인해 헌의(獻議)하였는데, 이 의()가 올라가자 사형을 감면하라는 특명이 내려졌다(議上 特命減死)”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1795)는 정탁의 상소문으로 <신구차(伸救箚)>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를 실었다. 서두에 분명히 이 차자(箚子)를 마련하여 다시 올리려 하였는데 앞의 헌의에 따라 사형을 감면하라는 윤허를 받았기에 그만두었다(更擬上箚論救. 聞前議入啓, 蒙允, 特下減死之命, 故停之)”라고 썼는데도 말이다. 임금의 윤허를 받은 상소문은 이순신옥사의<신구의(伸救議)>였다.

그런데도 이충무공전서는 왜 이순신옥사의를 취하지 않고 <논구이순신차>를 택했을까, 역사를 거슬러 편찬관 윤행임, 검서관 유득공에게 물어볼 일이다. 그러나 비교하건대 이순신옥사의는 비교적 단문의 내용으로 함축적이고 이성적인 상소문이다. 반면 <논구이순신차>는 먼저 올렸던 이순신옥사의에다 설명을 보완하고 용례를 변경하느라 장문의 내용으로 서술적이고 감성적인 상소문이 되었다. 예로부터 명문(名文)이란, “가득 담았지만 뺄 것이 없고, 축약했지만 빠진 것이 없는 글이라 했다. 추정컨대 두 상소문 모두 명문이지만, 간절하고 호소력 있는 <논구이순신차>를 택함으로 <신구차>가 잘못 알려진 상소문이 되었다.

정탁은 왜 목숨 걸고 이순신을 살리려고 했을까?

이순신과 편지로 교류했던 소통주의자 정탁이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19살이나 많은 정탁과 주고받은 편지가 등장한다. 정탁은 갑오년(1594)엔 종1품 찬성, 을미년(1595)엔 정1품 우의정, 병신년(1596)엔 정1품 영중추부사였다. 조정의 핵심 관료로서 전쟁의 상황 파악을 위해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꾸준히 소통하며 정보를 교환했던 두 사람이다. 이순신의 우국충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정탁으로서 이순신을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마침내 정탁이 올린 상소문 이순신옥사의로 죽음을 면한 이순신은 명량대첩으로 조선 수군을 재건했고 노량대첩으로 일본군을 쫓아냈다. 정탁이 이순신을 살린 것은 곧 조선을 살린 것이었다.

인간의 생명을 존엄했던 행지중추부사 정탁이었다. 영의정 류성룡이 쓴 징비록(懲毖錄)이다.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임금께서 대신들에게 그의 죄를 논하라 하였는데 판중추부사 정탁(鄭琢)만이 이순신은 명장이니 죽이면 안 됩니다. 군사상의 이해득실은 먼 곳에서는 판단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그를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순신을 한차례 고문하여 처형을 면해 주고 관직을 삭탈하여 충군시켰다.” 여기서 바로잡을 일은 정탁의 관직이다. 징비록」 「이충무공전서등 여러 사료에서 우의정 또는 판중추부사로 쓰고 있다. 그러나 정탁의 당시 관직은 행지중추부사였다.

인간의 권리를 우선했던 인권옹호자 정탁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이다. 정탁은 이순신옥사의, <김덕령옥사계> 외에도 황정욱·황혁·성영·정문부 등 곤경에 처한 여러 인재를 옹호했다. 이에 대한 사관의 평가다. “행지중추부사 정탁은 자상하고 온화하며 한결같이 순하고 착하여 사람들이 자비대사(慈悲大士)라 하였다.” 정탁은 누구라도 죄인이라고 해서 억울함을 당하지는 않는지, 약자라고 해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는지 항시 헤아리고 보살폈던 인권옹호자였다. 몸가짐이 산승(山僧) 같아 승상(僧相)이라 했던 정탁은 법의 기준보다 인간의 권리를 우선했던 조정의 중심추 같은 충신이었다. 오늘의 위정자(爲政者)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또 한 분의 위인, 정간공(貞簡公) 약포 정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