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성석 칼럼] ​​​​​​​사람을 얻는 지혜, 이순신과 진린(陳璘) 작전통제권을 쥔 명군(明軍) 도독(都督) 진린
[방성석 칼럼] ​​​​​​​사람을 얻는 지혜, 이순신과 진린(陳璘) 작전통제권을 쥔 명군(明軍) 도독(都督) 진린
  • 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
  • 승인 2020.08.10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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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br>
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

사람을 얻는 지혜, 이순신과 진린(陳璘)
작전통제권을 쥔 명군(明軍) 도독(都督) 진린

“626일 강가에서 진 도독(陳都督)을 전별할 때 도독이 나는 천조(天朝)에서 명을 받아 수군을 총령(總領)하고 있으니, 주사(舟師)와 변장(邊將)들을 절제(節制)해야만 한다. 배신 중 혹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일체 군법으로 다스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제 중국 장수가 아군과 함께 거처하여 방해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어렵고 쉬운 것을 막론하고 독촉이 성화같고 심지어 중요한 시기를 당하여 대처할 때도 자기들 마음대로 하여 우리의 뜻이 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을 세울 만한 일에는 아군은 손도 대지 못하게 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번번이 우리에게 책임을 돌리는 등 지난날의 일들이 사사건건 이와 같았습니다.” 선조실록

(, 임금)이 청파(靑坡, 용산구 청파동)까지 나와서 진린을 전송했다. 나는 진린의 군사가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함부로 하고 노끈으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역관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있던 재상들을 보고 말하기를 안타깝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패하겠구나! 진린과 함께 군중에 있으면 행동에 견제를 당할 것이고, 또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서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고 군사들을 학대할 것이다. 이것을 제지하면 더욱 화를 낼 것이고, 그대로 두면 한정이 없을 것이니, 이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전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이 동의하고 탄식할 뿐이었다.” 징비록

진린(陳璘)에게 일본군의 목을 바친 이순신

비변사와 영의정 류성룡의 근심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순신은 사람을 얻을 줄 아는 리더였다. 진린이 고금도(완도군 고금면)에 이순신과 합세한 건 무술년(1598) 716일이었다. 진린의 군대가 당도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먼바다까지 나가 정중히 모시고 성대한 잔치를 베푸니 기뻐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진린이 도착한 지 사흘 만에 절이도(고흥군 거금도) 해전이 벌어졌다. 첫 번째 연합작전에서 진린은 겉돌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우리 수군이 거둔 일본군의 목 40여 급을 진린에게 바쳤다. “이곳의 승첩은 바로 장군의 승첩입니다. 우리가 베어온 적의 머리를 장군에게 드리니 여기 온 지 몇 날도 되지 않아 황제에게 이 공을 아뢴다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진린이 크게 기뻐하니 이순신은 자신의 것을 줄줄 아는 리더였다.

이순신이 무조건 호의만 베푼 건 아니었다. 명군의 행패와 약탈이 잇따르자 백성의 원성이 드높았다. 이순신은 부하들에게 막사를 모두 헐어버리라고 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옷과 이부자리도 모두 끌어내 배에 싣도록 하였다. 진린이 당황하여 어쩐 일인가 물으니 여러 번 당부에도 불구하고 귀국의 군사들이 만행을 일삼으니 백성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모두 이곳을 떠나려 합니다. 대장의 몸으로 혼자 남을 수 없으니 나와 수군도 함께 떠나려고 합니다하였다. 진린이 깜짝 놀라 이순신을 만류하자, 그렇다면 자신에게 명군의 처벌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진린이 청을 들어 처벌권을 인정하니 명군들이 이순신을 무섭게 여겨 진영이 편안해졌다. 이순신은 할 말은 할 줄 아는 리더였다.

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조선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급사하자 일본군은 퇴각을 서둘렀다. 이순신은 퇴로를 막아 모조리 수장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작전통제권을 쥔 도독 진린이 이순신의 작전을 가로막았다. 퇴로를 열어달라는 일본군의 뇌물에 회유된 것이다. 굳이 도망가는 일본군과 싸워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명군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진린을 설득했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친다면, 당신은 조선을 지킴으로 명나라를 방어했다는 국가적 대의를 이룰 수 있을뿐더러, 당당히 개선장군으로 금의환향하는 개인적 명예를 취할 수 있을 것이오.” 급기야 진린도 노량으로 나가 일본군의 퇴로를 막아섰다. 마침내 이순신과 함께 적선 3백 척 중 2백여 척을 분멸하며 임진전쟁 최대의 전투이자 최후의 전투였던 노량해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이순신과 진린이 함께했던 시간은 불과 4개월 남짓이다. 하지만 진린에겐 경외(敬畏)하는 장수 이순신이었다. 처벌권과 지휘권을 양보했을 뿐 아니라 극존칭 어버이 야()를 붙여 이야(李爺)’라 칭했던 진린이었다. 이순신에게 작은 나라에 살 사람이 아니니 명으로 들어가 벼슬을 하라고 권하기를 여러 번이었다. 이순신이 순국하자 만장을 지어 슬퍼했고, 귀국길엔 아산현에 들려 이순신의 장자 회()에게 조의를 표하고 앞날을 걱정했다. 온전히 이순신의 사람이 된 진린이었다.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사람이다. 사람을 얻는 지혜, 말도 통하지 않는 이방의 장수를 뜨거운 가슴으로 품어 안은 이순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되 상대의 입장도 배려하는 이순신이었다. 진린이 그토록 존숭했던 이순신을 추모하는 말씀이다.

이순신은 경천위지지재(經天緯地之才) 천지를 씨줄과 날줄로 짜듯 나라를 바로 세운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지공(補天浴日之功) 뚫어진 하늘을 꿰매고 해를 씻겨 빛을 내듯 나라를 바로 잡은 공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