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31 22:00 (토)
[방성석 칼럼] 새총(鳥銃)은 대포(銃筒)를 이길 수 없다.
[방성석 칼럼] 새총(鳥銃)은 대포(銃筒)를 이길 수 없다.
  • 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
  • 승인 2020.10.12 09:1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br>
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

육전(陸戰)에 울고 해전(海戰)에 웃고…….

신묘년(1591) 7월, 조선의 국정을 총괄하는 비변사가 매우 바쁘게 돌아갔다. 일본군의 침략이 가시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정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헛다리만 짚고 있었다. 즉 “왜적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오랑캐(島夷)로 해전에는 능하지만, 육지에 오르기만 하면 민활하지 못하다. 하여 육지 방비에 전력하기를 주장하고, 대장 신립은 수군을 철폐하자고 청하여 마침내 호남 영남 큰 고을의 성들을 증축하고 보수하도록 명하였다.” 일본의 전국시대 백 년의 전투역량을 간과한 탁상공론이었다. 이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장계를 올려, “바다로 오는 적은 바다에서 막는 것이 제일이라 수군을 결코 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진년(1592)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예상과 달리 일본 육군은 강했고 조총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부산이 이틀 만에 함락되고 순변사 이일은 상주 전투에서 패하여 단기로 도망쳤다. 삼도 순변사 신립은 충주전투에서 패하고 스스로 남한강에 빠져 죽었다. 하기야 영의정 류성룡에게 “일본군은 걱정할 게 없습니다. 비록 조총이 있다 해도 어찌 백발백중이겠습니까?”하고 큰소리쳤던 신립이니 말이다.

그러나 해전은 달랐다. 일본 수군이 해전에 능하다고 했지만, 노략질을 일삼고 병참 보급에 주력한 까닭에 병법과 전술로 싸우는 이순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전쟁 초기 4개월 만에 일본 군선 3백여 척이 불에 타 수장되고, 일본 군사 2만여 명이 사상되었다. 조선 군선은 단 한 척도 당하지 않았고, 이순신의 군사는 2백여 명 사상당했다. 조선 수군의 압승이었다. 이순신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니, 평양까지 점령했던 일본군은 조명연합군에 밀려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화약(火藥)이 중요하다, 염초를 개발하라!

조선 수군에겐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최대의 사거리와 막강의 파괴력을 지닌 대형 화포 즉,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 등 화약 무기였다. 일본군에겐 나는 새도 능히 맞춘다는 이른바 조총(鳥銃)이 있었지만, 조선 수군의 대포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총에 불과했다. 대포의 최대사거리는 1천~1천 6백m, 조총은 2백m 정도였다. 조총의 유효사거리는 불과 50m 내외로 먼 거리에서 대포를 쏘는 판옥선을 맞출 수 없었고, 눈앞까지 접근하는 거북선을 뚫을 수 없었다.

문제는 대포도 조총도 화약이 없으면 무용지물인 무기였다. 이순신도 장계에서 화약의 부족을 호소했다. “그동안 다섯 번이나 영남해역에 출전하느라 화약을 거의 다 써버렸고, 본도(전라도)의 순찰사·방어사·의병장 그리고 경상도의 순찰사·수사들까지 요청이 많아 재고가 거의 없습니다” 하였다.

이순신이 군관 이봉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화약을 만들어라!” 그러나 명령을 내리는 이순신도 지시를 받은 이봉수도 무과에 급제한 무관일 뿐 화약 기술자는 아니었다. 더구나 고려말 최무선이 원나라에서 배워 온 화통도감(火㷁都監)의 염초기술도, 조선초 세종조에 간행된 총통등록(銃筒謄錄)의 화약 기술도 극비에 부쳐져 전해지는 것이 없었다.

이봉수는 세종실록 등 단편적 기록을 취합하여 화약의 주원료인 염초(질산칼륨 KNO₃)개발에 착수했다. 주로 담 밑이나 아궁이 등에서 검고 매운 흙 즉 질산칼륨이 많이 함유된 흙을 긁어모았다. 이를 가마솥에 넣고 끓이고 졸이고 식히기를 반복하여 염초개발에 성공했다. 염초(76%)+목탄(19%)+유황(5%)의 조합이 화약이다. 이순신이 올린 장계이다. “신의 군관 이봉수가 그 묘법(妙法)을 알아내어 3개월 동안 염초 일천 근을 끓여내었으므로, 그 염초를 조합하여 본영과 여러 포구에 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다로 오는 적(海寇)은 바다(水戰)에서 막는다

만일 조정이 수군을 폐했다면, 만일 수군에 이순신이 없었다면, 만일 이순신에게 화약이 없었다면,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부하의 비범한 재주를 신뢰하고 활용하는 이순신의 경영 마인드와 사명과 의지로 염초를 개발해낸 이봉수의 기술적 아이디어의 승리였다. 이와 같은 경영과 기술의 만남은, 이순신과 나대용의 거북선 창제, 이순신과 정사준의 조총개발 등으로 조선 수군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사실 조선 수군은 원래부터 강했다. 그러나 수군이 강하다고 모두 다 이기는 건 아니었다. 예컨대 통제사 이순신은 7년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그러나 후임 통제사 원균은 불과 5개월 만에 처참하게 패하고 자신도 죽었다. 이순신과 똑같은 바다, 똑같은 수군, 똑같은 무기로 싸웠던 칠천량 해전의 참패는 조선 수군의 궤멸이었다. 수군이 강하려면 수장(水將)이 강해야 한다. 이는 리더의 사명, 리더의 역할, 리더의 책임 곧 리더의 중요성이다.

비변사가 해전 방비를 경시했어도 신립이 수군 철폐를 주장했어도, 수군을 유지하고 수군이 대승할 수 있었음은 리더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 왈, ‘차알해구 막여수전 수군결불가폐지야(遮遏海寇 莫如水戰 水軍決不可廢也), 해적(海賊)을 막는 데는 해전이 제일이라 수군을 결코 폐할 수 없습니다.’ 이때 벌써 왜(倭)와의 흔단(釁端)이 벌어졌건만 조정과 민간은 무사태평으로 지나고, 순신(舜臣)만이 홀로 걱정하여 크게 전함을 보수하고 군사들을 다스림에도 법도가 있었다.”(宣廟中興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