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6 18:13 (금)
[방성석 칼럼] 삼일절에 만나는 유관순과 이순신
[방성석 칼럼] 삼일절에 만나는 유관순과 이순신
  • 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
  • 승인 2021.03.0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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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br>
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

민족의 불꽃, 유관순 열사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 탑골공원에 운집한 수많은 학생과 시민의 ‘대한 독립 만세!’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용기를 얻은 백성들,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에 독살설이 퍼지면서 비탄에 빠진 백성들의 함성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은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한 달 뒤 4월 1일 오후 1시, 음력으로 3월 1일, 매봉산 봉홧불을 신호로 아우내 장터에 3천여 명의 ‘대한 독립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강제 휴교령으로 고향에 내려온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 유관순이 ‘아우내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시위 군중을 이끌던 유관순이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피를 흘리며 머리채를 잡혀 끌려갔다. 만세를 연호하던 시위대와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도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죽어갔다. 무려 19명이 죽고 30여 명이 부상한 ‘아우내 만세 시위’의 주동자 유관순은 천안헌병대에서 공주감옥으로 그리고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으로 이감되었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공방을 벌인 유관순은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17세 소녀 170cm의 당당한 키, 유관순의 명철한 논리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

“제 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왜 죄가 되느냐?”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

“자유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며 누구도 이것을 빼앗을 순 없다. 무슨 권리로 신성한 인간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제 나라를 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그러나 재판장의 선고는 오히려 궁색했다.

“피고는 신성한 대일본제국의 법정을 모독했다.”

1919년 6월 30일,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4월 28일, 영친왕 결혼 사면령으로 형기가 절반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고등학생 유관순에게 선고한 3년형은 민족대표 손병희에게 선고된 3년형과 같은 최고 형량이었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경성감옥 유관순의 8호 감방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3·1운동 1주년, 3천 명이 넘는 수감자의 “대한 독립 만세!” 함성이 애오개·서소문까지 울려 퍼졌다. 주동자 유관순이 무사할 리 없었다. 무자비한 구타와 잔인한 고문, 좁디좁은 독방에 유관순은 제대로 누울 수조차 없었다. 몇 달 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차디찬 감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태원 공동묘지에 모셔졌던 무덤은 찾을 길이 없고, 고향의 초혼묘엔 불꽃 같은 영혼만이 잠들어 있다.

닮은꼴 영웅, 이순신과 유관순 그리고 백성들

영웅은 어려서부터 닮았다.

1545년 이순신은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마른내(乾川), 서울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유학을 공부하던 이순신이 충남 아산으로 내려간 건 12세 전후였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기록이다. “어려서 놀이할 때도 매양 대장 노릇을 하였고, 무사들이 서로 농을 하면서도 공에게만은 감히 너 나 하지 못하였다.”

1902년 유관순은 여러 줄기 개천이 하나로 모여 흐른다는 아우내(竝川), 충청도 목천(현 천안시 병천면)에서 태어났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던 유관순이 천안 병천으로 내려간 건 17세 때였다. 유관순의 조카 유제한의 기록이다. “어려서부터 씩씩한 장난을 좋아하고, 진쌈하기 놀이를 하면 반드시 우두머리가 되었다. 어른의 말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면 한사코 듣지 않아 어른들도 능히 그 뜻을 굽히지 못하였다.’

영웅은 죽음까지도 닮았다.

이순신이 류성룡에게 보낸 편지이다. “사천에서 왜적의 탄환에 맞은 상처로 늘 고름이 흐르고 밤낮없이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씻건마는 쉽게 쾌차하지 않습니다.”

이순신의 순국 관련 실록의 내용이다. “이번 노량 해상에서 밤새워 혈전하여 적선 2백여 척을 포획까지 하였는데 불행히도 왜적의 탄환에 맞아 목숨을 잃게 되었다.”

유관순과 같은 감방에 있었던 어윤희의 증언이다. “병천에서 붙잡힐 때 총검에 찔린 상처가 도무지 낫지 않고 항상 고름이 흘러나왔다. 수시로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해 온몸이 성한 날이 없었다.”

유관순과 기숙사 한방 친구였던 이정수의 회고이다. “학교에서 시신을 인수하여 안치하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서 옷을 칼로 찢어 벗기고 소독을 했다.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왜놈들이 얼마나 발길로 찼는지 방광이 부서졌다고 했다.”

영웅의 주체는 백성이었다.

아산(牙山)과 천안(天安)은 경계가 맞닿은 고장이다. 임진왜란 3대첩으로 불리는 한산대첩의 충무공 이순신은 아산 출신이고, 진주대첩의 충무공 김시민은 천안 출신으로 유관순(병천면 용두리)의 옆 마을(병천면 가전리)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순신의 임진왜란에도 유관순의 3·1운동에도, 스스로 찾아든 의·승병과 기꺼이 참여한 백성이 있었다.

3·1운동 민족대표들이 연행되어 지도부가 와해 되었어도 5월 말까지 무려 3달 동안, 전국 218개 시군 중 211개 시군과 만주·연해주·미주까지 퍼질 수 있었다. 모두 학생·교사·훈장·목사·스님·한의사·농민·기생까지 직업과 신분을 뛰어넘는 수많은 백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곧 진정한 조국의 영웅이었다.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왜적을 물리쳐서 나라를 구해냈다. 유관순은 일제강점에 저항해서 조국에 헌신했다. 비록 유관순은 순국했지만 3·1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었고,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임시정부 수립을 재촉했고,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등 조국의 독립을 앞당겼고, 중국의 5·4운동·인도의 민족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3·1운동 102주년을 맞는 오늘 이순신과 유관순을 만나보는 이유가 있다. 조선은 개국 200년 만에 임진왜란으로 패망의 위기를 당했다. 그리고 300년 만에 경술국치로 망국의 치욕을 당했다. 결코, 아픈 역사를 들춰 일본의 잘못을 응징하자는 뜻은 아니다. 번영된 대한민국, 오늘의 역사는 수많은 영웅의 고난과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왜 아픈 역사를 되새겨야 하는지, 어떻게 나라를 지키고 미래를 펼쳐야 하는지, 현재에 대입해도 딱 들어맞는 최남선의 <3·1독립선언서>에서 그 답을 구해본다.

“우리는 지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도 급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도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이지 결코 오랜 원한과 한순간의 감정으로 샘이 나서 남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낡은 생각과 낡은 세력에 사로잡힌 일본 정치인들이 공명심으로 희생시킨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