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br>
방성석 경제학박사/(주)이글코리아 대표이사, 해사 충무공연구 자문위원

백성을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조선의 실천하는 성리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나라의 위기를 무섭게 경고했다. 특히 조야를 경악시킨 단성 현감 사직소(乙卯辭職疏)에서, 지금 조정과 관료의 부패로 보아 백성을 털끝만큼도 보호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다며 직설로 고사했다. 또 동갑내기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초야에 은거하는 남명에게 출사를 권유하자, 처사 남명은 부패한 관직에 나가는 것은 곧 도둑질하는 것과 같다며 거칠게 회신했다.

이런 남명이 지리산 아래 살면서 남해의 잦은 왜구 출몰을 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왜적이 침략해 올 것을 경고했다. 평생 칼을 품고 자신을 경계했던 남명은 제자들에게 백성을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며 병법을 전수했다. 급기야 남명 사후 20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곽재우·김면·정인홍 등 남명의 제자 수십 명이 왜적과 맞서 싸우니 그들이 곧 백성을 지키는 의병장들이었다.

이순신 역시 백성 보호가 우선이었다. 임진년(1592) 네 차례 출동을 보면, 1차 출동 때는, 골짜기마다 가득한 피난민을 보고 ‘돌아갈 때 데리고 갈 테니 잘 숨어 살아 있으라’ 하였으나, 임금의 몽진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오게 되었다. 이순신은 피난민들이 애련(哀憐)하여 그 도의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 저들의 양곡이 떨어져 곧 굶어 죽을 것이 분명하니 끝까지 찾아서 구호해달라고 부탁했다.

2차 출동 때는, 산골짜기에 숨어있는 노인과 부녀들이 너무나 비참하고 불쌍하여 왜선에서 노획한 쌀과 옷감 등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3차 출동 때는, 산골짜기로 달아나 숨은 백성이 매우 많아 만약 적들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 버리면 백성이 왜놈들에게 어육(魚肉)의 화를 당할 것이므로 잠시 후퇴한 채 밤을 지새웠다. 4차 출동 때는, 상륙한 적들이 천지에 가득한데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는다면 궁지에 빠진 왜놈들이 우리 백성에게 어떤 짓을 할지 몰라 다음을 기약하며 본영으로 돌아왔다. 적을 치는 일 못지않게, 백성을 지키는 일이 중요했던 이순신이다.

백성은 먹을 것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한다

조선의 개혁을 주장했던 성리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끊임없이 나라의 위기를 경고했다.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진시폐소(陳時弊疏) 등이다. “2백 년 역사의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나라도 아닙니다.” “백성은 먹는 것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하니,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어지고 백성이 없으면 나라도 없는 것입니다.”

율곡이 죽고 8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율곡의 우려대로 경제가 무너진 조선의 참상은 너무나 참혹했다. 선조실록이다. “판중추부사 최흥원은, ‘굶주린 백성들이 더욱 많이 죽고 있는데 그 시체의 살점을 모두 베어 먹어 단지 백골만 남아 성밖에 쌓인 것이 성과 높이가 같습니다’ 하였고, 영의정 류성룡은 ‘죽은 사람의 살점만 먹을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도 서로 잡아먹는데 포도군이 적어 제대로 금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탁상공론만 하는 조정 대신과 달리 통제사 이순신은 실사구시, 둔전(屯田)을 짓겠다고 장계를 올렸다. “당장 백성이 굶어 죽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피난민들을 타일러 농사지을 만한 돌산도에 들어가 살게 하고 방금 봄갈이를 시켰습니다.” “순천의 돌산도뿐 아니라 흥양(고흥)의 도양장, 절이도(거금도), 강진의 고이도(완도), 해남의 황원목장 등에 땅을 갈고 씨를 뿌린다면 그 소득이 엄청날 것입니다. 다만 농군을 구할 길이 없으니 백성들에게 나누어 경작시키고, 절반만 거두어들인다면 군량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소득의 절반은 백성의 식량으로 나머지 절반은 군사의 군량으로 조달하니 서로가 상생하는 백성 사랑이었다.

나라 없는 백성은 있어도 백성 없는 나라는 없다.

이순신은 처음에 두 형을 따라 10년 이상 유학을 공부했다. 재주가 있어 성공할 만도 하였으나 매양 붓을 던지고 군인이 되고 싶어 하였다. 무인(武人)이 문(文)을 겸비하니 무문겸전(武文兼全)이었다. 이순신은 백전백승(百戰百勝), 싸워서 이기는 장수였을 뿐 아니라. 민유방본(民惟邦本),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아는 유생이었다. 둔전을 경작하여 백성의 식량을 구하고 군사의 군량을 조달하는 실사구시의 장수였다.

사실 이런 일은 감사(監使)나 병사(兵使)들이 먼저 나서서 할 일이었다. 그러나 수사(水使) 이순신은 강산이 짓밟히고 백성이 살육되는 마당에 문무(文武)가 어디 있고, 수륙(水陸)이 어디 있고, 영호(嶺湖)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오직 이 땅의 주인인 백성이 있을 뿐이다. 나라 없는 백성은 있어도 백성 없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백성 사랑은 무한 신뢰의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이순신이 통제사에 복직되어 낙안읍성에 이르자, 백성들이 오리씩이나 늘어서서 눈물을 흘리며 환영했고, 벌교마을에선 노인들이 늘어서서 술병을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억지로 울면서 권했다.

명량대첩을 끝내고 고금도에 정착하자, 장사들이 다시금 구름같이 모여들고, 남녘의 백성들이 이고 지고 찾아들어 진영의 웅장함이 한산도에 열 배는 되었다.

이순신이 순국하고 그의 유해가 고금도를 거쳐 고향 아산에 이르는 천릿길에, 남녀노소 백성이 모두 나와 운구행렬을 가로막고 울부짖어 통곡했고, 이르는 곳곳마다 선비들은 제문을 짓고 백성들은 노제를 바치니 영구 수레가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순신에게 받은 백성 사랑, 그 사랑 오롯이 돌려주는 백성의 이순신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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